의로움을 추구한 선비들의 기상. 서원(書院)
Date
2018. 11. 15.
Place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1호
Adress
경상북도구미시 임수동 373
1. 문헌 조사
조선 중기의 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1655년(효종 6)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 장현광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1610년에 세운 서당) 자리에 부지암서원으로 창건되었다가 1676년(숙종 2) ‘동락(東洛)’이라는 이름을 사액 받아 동락서원으로 칭해지게 되었다.
‘동락’이란 ‘동국(東國)의 이락(伊洛)’이라는 뜻으로,‘이락’은 송나라의 성리학자인 정이와 그의 형 정호가 강학하던 곳을 말한다.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2년 사당을 복설하였고, 1971년 건물 6동을 복원하면서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 1581∼1656)도 함께 배향하기 시작하였다.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세워져 있으며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문루(門樓)인 준도문(遵道門)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된 강당 건물인 중정당(中正堂)을 비롯하여 사당인 경덕묘(景德廟), 동·서재인 근집재(槿執齋)와 윤회재(允懷齋), 신도비각 등이 있다. 향사일은 2월과 8월의 중정일이다.
서원 이란?
서원의 명칭은 당나라 현종 때 집현전서원 등의 설치에서 유래하였다. 원래는 명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기능을 주로하며 후학을 모아서 교육을 하는 기능도 같이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서원
고려시대에는 사설 교육기관으로 최총의 문헌공도를 비롯한 12공도 크게 번성하였으나 조선의 건국과 함께 없어지고 지역의 명망가를 중심으로 서재. 서당. 정사 같은 소규모 교육기관을 많이 장려하였다. 초기에는 선현에 대한 제사기능을 같이 하지 않았으나,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이 최초의 서원이다.
2. 답사여정
구미의 여러 문화유적 중 금오산성과 동락서원, 예전에 가보았던 금오산의 절을 꼽을 수 있었다. 예전에 가보았던 곳을 제외하고, 서원에 좀 더 마음이 가 선택하게 되었다. 도착하니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세워져 있으며 380년 된 보호수가 서원 앞을 지키고 있었다.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의 팔각지붕 문루(門樓)인 준도문(遵道門)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된 강당 건물인 중정당(中正堂)을 비롯하여 사당인 경덕묘(景德廟), 동·서재인 근집재(槿執齋)와 윤회재(允懷齋), 신도비각 등이 있었다. (중정당까지는 얕은 한자지식으로 알 수 있었으나 다른 건물들은 문헌조사를 통해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관람과 기념사진 촬영 후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동락공원에서 무료로 대여해 주는 자전거를 타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낙동강과 어우러진 동락서원의 지리적 수려함과 한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난 후 허기가 지고 점심시간이 다가와 점심식사를 가졌다. 동락서원은 구미공단의 거의 한복판에 있음을 위 지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임수동 옆의 인동은 구미시내와 대등할 정도의 번화가라서 맛있는 식당들도 많았다.
3. Review
조선시대의 선비는 탐욕과 의리의 갈등에서 의리를 지킨 주체였다. 의로움을 추구한 선비의 기상과 덕행을 마음에 되새기게 하는 곳이 바로 서원이다. 우리는 역사 속의 서원을 통하여 맑고 고결한 선비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에는 우리들의 마음과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게 하는 지행합일의 실천적 교훈이 있었다. 우리의 역사가 지속되는 것은 이와 같은 선비정신이 살아 이어 내려온 까닭이다. 이러한 정신이 투영된 서원은 우리 역사와 문화의 연결고리일 것이다.
오늘날 서원의 하루는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한적한 자연 속에 있다 보니 사람들의 발길은 드물고, 궁궐이나 종묘처럼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이 없다보니 건물을 구경하러 오는 이도 많지 않았다. 내가 방문하였을 때 방문객이 나의 가족뿐이었을 정도로 말이다. 조선시대에 수많은 서원들이 세워져 정치·문화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에 비하면 다소 초라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서원의 겉모습만 보는 것에 불과하였는데 서원의 진정한 가치는 그 안에 숨 쉬고 있는 정신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불도를 닦는 곳이 사찰이라면 서원은 유교 성현을 모시고 그들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할 인재를 키우는 사설 교육기관이었다. 사람들은 성현을 모시고 공부하는 서원을 서울 밖의 성균관이라 불렀고, 유생들은 그들의 학문과 덕성을 따라 배우기 위해 책을 들고 모여들었다. 서원은 성현의 심오한 학문과 덕성의 배움터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보존하고 정서를 함양하는 수양의 공간이기도 했다. 유생들은 끊임없이 인격을 닦고 기르며 스스로를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의 흔적은 서원 곳곳에 지금까지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편액을 통해서 조선시대 선비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인간상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전에는 화려한 장식과 문양으로 구성된 궁궐이나 규모가 큰 서원을 답사하였다면, 동락서원을 답사하며 비록 규모가 작더라도 그 속에 담긴 소중한 의미가 있다는 점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교외체험학습을 통해 동락서원 뿐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도 소중하고 보존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어 좋았다.
Reference
문화재청 – 동락서원 강당
두산백과 – NAVER 검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서원의 전통가치와 현대적 계승 – 도서
문헌조사의 사진 : 문화재청
그 외 사진 : 기념촬영 사진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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